고령에 수갑 채우는 건 부담…성공해도 쿠바엔 베네수엘라 '델시' 같은 인물 없어
허약한 마두로 권력과는 달라…라울의 권력은 '무소불위'
"라울은 압송되느니 자살할 것"…전력난 심화로 쿠바가 가진 협상카드는 제한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송광호 특파원 = 미 법무부가 쿠바 막후 실력자이자 혁명 원로인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대통령을 기소하고, 곧이어 항공모함을 카리브해에 배치하면서 쿠바 정권과 최고 지도자의 명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특히 미국이 기소 후 법정에 세우기 위해 니콜라스 마두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압송한 전례에 비춰, 라울 카스트로 역시 똑같은 수순을 밟게 될지가 최대 관심사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마두로 압송 당시 이를 '법 집행 작전'(a law-enforcement operation)이라 명명한 바 있다.
미국은 마두로 전 대통령을 마약·테러 공모 등의 혐의로 기소한 뒤 지속해서 압박해왔다. 특히 압송 직전에는 항공모함을 베네수엘라 앞바다에 진주시키며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번 쿠바를 향한 미국의 행보 역시 이와 판박이다.

미국은 지난 1996년 발생한 '구출의 형제들' 항공기 격추 사건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라울 카스트로에 대해 기소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면서 실질적 기소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20일(현지시간) 미국 법무부가 라울 카스트로를 겨냥해 내놓은 공소장은 기소 내용이 구체적이며 그 혐의도 무겁다. 미국인 살해 음모, 항공기 파괴, 살인 등 모두 7개의 혐의를 적용했다. 살인 혐의가 포함돼 있기에 유죄가 인정되면 최대 사형 또는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
기소 직후에는 항공모함 전단을 쿠바 앞바다인 카리브해에 배치했다. 마두로 전 대통령을 압박했던 시나리오가 그대로 재연되는 모양새다. 게다가 미국과 제법 거리가 있는 베네수엘라와는 달리, 쿠바는 미국 본토와의 거리가 145㎞에 불과해 마이애미에서 쿠바 수도 아바나까지 비행기로 1시간 남짓이면 닿을 만큼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미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전격적인 군사 작전이나 압송 시도가 가능한 거리인 만큼, 쿠바 정권이 체감하는 물리적 압박감은 베네수엘라 때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쿠바 독립기념일을 맞아 발표한 메시지에서 "마두로에 대한 기소와 축출은 아바나에 있는 그의 사회주의 동맹국들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며 "이곳은 우리의 반구이며, 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미국을 위협하는 자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주 쿠바를 방문한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협상 대상자인 라울의 손자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카스트로를 만나 마두로 사례를 언급하며 폐쇄적인 정치체제와 경제를 개방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쿠바 당국자에게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이 라울을 마두로처럼 압송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의 나이다. 1931년 6월3일 생인 라울은 올해 만 95세의 고령이다. 설사 미국이 라울을 체포해 간다고 해도, 95세 노인에게 수갑을 채우는 모습이 마두로 체포 때만큼 드라마틱한 정치적 승리 효과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또한 상징성과 권력의 무게감도 마두로와는 격이 다르다. 마두로는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로 행정가이자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그의 뒤에는 차베스 정권 시절부터 라이벌이던 디오스다도 카베요 내무장관처럼 강력한 내부 경쟁자와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같은 반대 세력이 늘 있었다.
반면 라울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이자 국방부 장관으로 반세기 동안 군권을 완벽히 장악한 쿠바 역사상 유일한 육군 대장이다. 또한 쿠바 경제를 쥐고 흔드는 군부 재벌 기업 '가에사'(GAESA) 역시 카스트로 가문이 독점하고 있다. 군권과 자금, 여기에 혁명 정통성까지 모두 쥔 그의 권력은 쿠바 내에서 무소불위다.

설령 그를 체포하더라도 트럼프와 밀월관계를 유지 중인 '한때 마두로 측근'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대통령 같은, 카스트로를 대체할 인물을 찾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미국의 고민이다.
라울의 혁명 동료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을 쓴 호르헤 카스타녜다 전 멕시코 외무장관은 WSJ에 "그들이(미국이) 아바나에서 '쿠바의 델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어 라울 카스트로가 미국에 순순히 투항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카스트로는 투항하느니 차라리 자신에게 총을 쏠 인물"이라고 평했다.
더구나 쿠바의 전체주의적 경향은 반정부 시위가 빈번했던 베네수엘라에 비할 바 아니다. 쿠바는 시민사회의 그림자조차 거의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전체주의 국가로 67년간 유지됐다. 쿠바 체제의 핵심 축인 내무부, 군부, 공산당은 고도로 결속돼 있다.
또한 일터에서부터 학교,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층을 꼼꼼하게 장악해 온 정권의 역사도 길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옹호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의 델시 로드리게스 같은 인물이 나올만한 내부 균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WSJ은 분석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대(對)쿠바 협상을 담당했던 리카르도 수니가 역시 "미국의 의도가 정권 내부 균열이라면 쿠바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퇴로가 없는 쿠바 정권은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최선의 옵션을 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전력난과 경제난이 초래한 치명적인 내부 균열이 '마두로 압송'과 같은 미국의 '전격 급습 작전' 가능성을 되레 키우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일각의 관측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역성장의 늪에 빠진 경제에, 파탄 지경에 이른 전력난이 쿠바 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지난 13일 아바나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정전 항의 시위는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던 쿠바식 통제 사회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자 민심의 임계점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이 최근 쿠바에 1억 달러(1천500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직접 쿠바 국민들에게 제공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현재 쿠바 정권이 마주한 길목은 외통수다. 미국이 던진 1억 달러의 원조 제안을 덥석 받자니 스스로 체제의 파산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이를 걷어차자니 폭염과 기근, 암흑 속에서 폭발할 민중의 분노를 감당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다.
수용과 거부, 어느 쪽이든 쿠바 정권이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카드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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