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와인·언어·영토에 얽힌 유산과 잔재…'가깝고도 먼' 상생
김명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부사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 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오늘날 아프리카를 논할 때 우리는 주로 중국, 한국 등 급부상하는 동아시아와 관계에 주목하곤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비즈니스와 정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수록 피할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거대한 그늘이자 실체가 있다. 바로 대륙 곳곳에 새겨진 '유럽(Europe)'의 흔적들이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대륙 분할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벨기에 등 다양한 종주국에 의해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년이 넘는(평균 70∼100년) 혹독한 식민 지배를 경험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언어, 제도, 문화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듯, 아프리카 역시 한 세기에 걸친 서구의 지배가 남긴 역사적 잔재와 유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리적으로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두 대륙은 수 세기에 걸친 정복과 식민 지배, 이주와 교역의 역사를 공유해 왔다. 그리고 그 역사적 결과물들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산업 구조, 언어, 문화, 심지어 영토적 경계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 아프리카 속 '유럽의 얼굴들' 그리고 해외 영토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일상에서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유럽의 흔적은 테이블 위의 식음료 문화다. 흔히 '신세계 와인'으로 분류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와이너리 역사는 17세기 후반으로 올라간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주와 함께, 종교적 탄압을 피해 아프리카 남단으로 이주한 프랑스 위그노(Huguenot) 교도들이 자신들의 포도 재배 및 와인 제조 기술을 스텔렌보스(Stellenbosch)와 프란슈후크(Franschhoek) 지역에 이식했다. 그 결과 오늘날 남아공은 세계적인 고품질 와인 생산국으로 자리 잡았으며,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서 마치 유럽의 시골 마을을 연상시키는 풍경을 자아낸다.

이러한 식음료 유산은 남부 아프리카의 또 다른 이웃나라인 나미비아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과거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미비아에는 여전히 독일식 건축물과 문화가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미비아의 국민 맥주인 '빈트후크'(Windhoek)다. 빈트후크 맥주는 1516년 제정된 독일의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물, 보리, 호프 외에는 어떠한 첨가물도 넣지 않고 양조된다.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정통 독일 맥주의 맛을 구현해 내며 독특한 유럽적 유산을 드러내고 있다.
알제리와 튀니지 역시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 프랑스계 이주민인 '피에누아르'(Pieds-Noirs)가 정착하면서 대규모 포도밭과 프랑스식 와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특히 알제리는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의 포도밭이 전염병으로 황폐해졌을 때 프랑스 본토로 막대한 양의 와인을 공급하는 주요 산지로 부상하기도 했다. 동아프리카 케냐 역시 영국계 이주민 정착의 영향으로 고산지 차(Tea) 문화와 서구식 농장 라이프스타일이 현지 문화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이러한 유럽적 유산은 스포츠와 레저 문화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남아공을 상징하는 스포츠인 럭비(Rugby)다. 영국 식민주의 시절 들어온 럭비는 과거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 차별 정책) 시절 백인 전유물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95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럭비 월드컵을 통해 인종 통합의 도구로 승화시키며 남아공의 대표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이 남긴 스포츠 유산이 아프리카의 정치·사회적 화해 역사와 궤를 같이한 셈이다.
또한 남아공을 비롯한 케냐, 짐바브웨, 모로코 등 대륙 전역에 조성된 수백 개의 골프장과 클럽하우스 문화 역시 전형적인 유럽의 유산이다. 영국과 프랑스 상류층이 이식한 이 고급 레저 공간들은, 오늘날 아프리카 현지 정치·재계 엘리트들이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핵심 사교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지 한가운데 펼쳐진 푸른 잔디와 서구식 클럽하우스는 '아프리카 속 유럽'을 실감케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자, 현지 엘리트 사회 접근을 위한 중요한 비즈니스 창구다.

더욱 흥미로우면서도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은 행정구역상 완전히 '유럽'에 속하는 아프리카 영토들이다. 인도양에 위치한 레위니옹(Reunion)섬과 마요트(Mayotte)는 프랑스의 정식 해외 데파르망(해외 영토)이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해안에 위치한 스페인의 자치도시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 역시 아프리카 땅 위에 존재하는 명확한 '유럽의 조각들'이다.
특히 세우타는 최근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지정학적 분쟁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을 피해 유럽 땅을 밟으려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모로코인과 서아프리카 이주민 수천 명이 한꺼번에 바다를 헤엄치거나 국경 장벽을 넘어 세우타로 밀입국을 시도하면서 대규모 난민 위기가 지속해 발생하고 있다.

◇ 식민주의가 남긴 언어와 제도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식민 종주국의 유산은 '언어'와 '제도'다. 아프리카 대륙은 프랑코포니(Francophonie·프랑스어권), 앙글로포니(Anglophone·영어권), 루소포니(Lusophone·포르투갈어권)로 크게 나뉜다.

서·중부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에서는 지금도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쓰이며, 정치·법률·교육 시스템이 프랑스식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서아프리카의 세파프랑(CFA Franc) 통화 제도는 프랑스 중앙은행과 연동을 통해 수십 년간 해당 지역의 금융을 지배해 왔다. 이 같은 언어와 행정 시스템의 동질성은 유럽 기업들이 아프리카 시장을 선점하고 주도권을 유지하는 압도적인 '선점 프리미엄'(또는 비경쟁 우위)으로 작용해 왔다.
◇ '가깝고도 먼 사이'…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설적 관계
그렇다면 아프리카 속에 존재하는 이 수많은 유럽의 흔적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와 유럽이 '가깝고도 먼, 애증과 역설의 관계'라는 점이다.
첫째, 지리적·문화적 '근접성'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는 시차가 거의 없으며, 언어와 제도의 공유로 인해 비즈니스 연결성이 매우 높다. 아프리카의 엘리트층은 대부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고, 유럽의 문화적 소비 패턴을 공유한다. 아울러 유럽 입장에서 아프리카는 자신들의 앞마당이자 가장 익숙한 시장이다. 알제리 근무 시절, 필자에게 프랑스어 구사 여부를 물으며 자국 내 남아있는 프랑스 문화에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치던 현지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둘째, 역사적 잔재가 낳은 '심리적 거리감과 반발'이다. 지리적·제도적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식민 지배의 잔재와 부의 불평등, 그리고 세우타 등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이주민 갈등은 아프리카 내에 깊은 반유럽 정서(특히 반프랑스 정서)를 남겼다. 최근 서아프리카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와 프랑스군 철수 요구는 식민 종주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제2의 독립운동' 성격을 띠고 있다.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셋째, 신흥국들에 열린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다. 유럽과의 역사적 앙금과 과도한 의존도에 피로감을 느낀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제 다변화된 파트너십을 원하고 있다. 과거의 식민지적 원죄나 정치적 패권 다툼에서 자유롭고 K-컬처와 첨단 기술력을 보유한 우리나라에 아프리카가 더욱 열린 태도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알제리 프로젝트 수주 지원활동 과정에서 현지 관계자들로부터 "한국인들은 자기 기술과 노하우를 친절하게, 그리고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는 호평을 직접 들었다. 한국을 향한 그들의 높은 기대감과 신뢰를 체감할 수 있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비즈니스적 통찰
아프리카 진출을 도모하는 우리 기업과 정책 당국자들은 '아프리카 속 유럽'이라는 이중적 맥락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아프리카 진출 시 프랑스식 법제와 비즈니스 관행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동시에 식민 종주국 중심의 일방적인 서구식 접근법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식민지 잔재와 역사적 아픔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프리카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유럽이 남긴 언어적·제도적 인프라는 적극 활용하되, 그들이 범했던 고압적인 태도나 자원 수탈적 접근을 지양해야 한다. '동등하고 존중받는 상생 파트너십'으로 다가가야 한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역사적 유산이 짙게 배어있는 대륙인 동시에, 그 유산을 넘어 자체의 정체성과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역동적인 무대다. 유럽과 '가깝고도 먼' 애증의 관계를 거쳐온 아프리카가 이제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파트너는 누구일까. 그들이 갈망하는 진정한 상생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진심 어린 노력을 기울인다면, 비로소 이 거대한 대륙과 함께 지속 가능한 성장의 미래를 향해 발을 맞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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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희 부사장
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부사장, 단국대 중동·아프리카학 박사, 헬싱키 경제대 MBA, 저서 '물어물어 찾아낸 나의 친구 아프리카', 아프리카지역본부장·파리관장·케냐관장·알제관장·소피아관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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