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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9) 조선시대는 상품화폐의 시대 2014-06-27 17:23:49
136만냥, 지방관청이 보유한 동전이 470만냥이었다. 당시 동전 총량이 700~800만냥 정도였다고 추정되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장부상으로는 동전의 8할을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쌀을 대량으로 저장하여 환곡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8) 대동법과 공납제도의 개혁, 변화 속의 지속성 2014-06-20 18:20:21
국가가 상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동법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상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물을 상납받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시장과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인천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예비 명단 60명 발표…최정 제외 2014-06-16 14:11:10
이재원(sk) 김태군(nc) ▲내야수(17명)= 박석민·김상수(이상 삼성) 오재원·김재호(이상 두산) 박병호·서건창·김민성·강정호(이상 넥센) 박종윤·황재균·문규현(이상 롯데) 박민우·모창민(이상 nc) 안치홍(kia) 정근우·김태균·송광민(이상 한화)...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7) 소농경영의 성장과 지주제의 발달 2014-06-13 18:43:58
실록에 보이고(『경종실록』 원년),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초에 전라도에 소작인이 전체 인구의 70%라고 하였다. 한참 뒤이지만 1918년에는 전국 경지 면적의 50%가 소작지였다. 더욱이 본래 씨앗과 조세는 지주가 부담하는 것이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소작인의 부담이 되었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6) 조선시대 노비의 수요와 공급 2014-06-09 17:43:19
노비의 비중도 감소하여 대구의 경우 1690년 43.1%였던 노비 수가 1789년에는 15.9%로 줄어들었다(15회 참조). 그러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노비제도가 쉽게 폐지될 수는 없었다. 특히 가사노동에 사역되는 여자 종(비) 수요는 계속되었고 남자 종(노)보다 가격도 비쌌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분야별 최고 로펌] 법무법인 바른, 부동산경매·상속 부문 두각…자문영역 키워 종합법률社 도약 2014-06-05 07:00:09
김재호 대표변호사는 “바른의 경쟁력인 송무에서의 비교우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자문 영역을 키워왔다”며 “그간의 자문역량 투자를 통해 바른을 찾는 고객들에게 ‘원스톱서비스’를 제공해드릴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대체투자자문’ 론칭바른이 전략적으로...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5) 양반, 조선왕조의 특권신분 2014-05-30 19:08:59
찾아간다면 아마 곧바로 체면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너무 많아져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없어졌다기보다는 호적상으로라도 노비를 보유하는 집이 많아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기를 열망하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마켓인사이트]한국, 일본에 비영리 회계기준 제정 '노하우 전수' 2014-05-27 14:00:00
한국회계기준원을 방문한 것도 이 작업의 일환이다.김재호 한국회계기준원 책임연구원은 “이날 회의에서 일본인 참석자들은 한국 비영리조직 회계기준 내용 자체는 물론이고 기준 제정 배경부터 절차, 적용 범위, 대학 복지법인 등 이해관계자 반응, 정부와의 협력 방안 등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질의를 했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4) 조선 전기의 국가재정…전세, 공물, 군역, 상납의 네트워크 2014-05-23 19:26:50
이 영의정 황희(1363~1452)가 대신들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은 지방 관원을 처벌하도록 임금에게 청하였다고 비판하였을 정도였다. 국가재정의 범위 안에 모든 중앙과 지방의 수입과 지출을 통합시키는 한편 이를 수량적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3) 조선시대의 인구 -장기 변동 2014-05-16 18:23:46
사회가 인구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음은 분명하다.무엇보다 19세기에는 중반부터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기 때문에 실질치로 계산하면 토지(논)의 가격이 하락하였는데 이에 비하여 노비의 실질 가격과 실질 임금이 더 빨리 하락하였으며, 산림의 황폐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