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업계의 경쟁 공식이 '속도'로 옮겨가고 있다. 생산 기술이 발전하고 글로벌 공급망이 촘촘해지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춘 옷을 만드는 것만으로 차별화하기 어려워지면서다. SNS에서 유행이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시장의 신호를 먼저 읽고 이를 빠르게 상품으로 내놓는 능력이 패션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 됐다.
인공지능(AI)은 이 속도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수개월이 걸리던 트렌드 분석과 상품 기획, 디자인, 샘플 검토는 물론 광고 촬영과 상세페이지 제작까지 AI가 파고들면서 옷 한 벌을 기획해 소비자에게 선보이기까지 걸리는 ‘리드타임’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수개월 전 상품을 기획해 대량 생산하던 전통적인 패션산업의 업무 방식도 AI을 만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월드가 패션 상품 하나가 소비자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한 결과 주요 업무 단계만 약 48개에 달했다. 시장 변화 분석과 상품 기획을 시작으로 디자인 개발, 샘플 제작, 품평, 생산, 물류, 광고 촬영, 상세페이지 제작, 온라인몰 등록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랜드는 이 48개 업무 단계를 하나씩 AI와 연결하고 있다. 트렌드 분석과 디자인 시안 생성, 작업지시서 작성, 광고 콘텐츠와 상세페이지 제작 등의 일부를 AI에 맡기고 직원은 최종 판단과 검증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가장 먼저 속도가 빨라진 곳은 상품 기획과 디자인이다. 기존에는 상품기획자(MD)와 디자이너가 수많은 온라인 콘텐츠와 이미지를 직접 살펴보며 유행을 분석했다. 이랜드는 AI 기반 트렌드 분석 플랫폼으로 공개된 시장 데이터와 패션 이미지를 분석해 상품 유형과 색상, 소재, 패턴, 스타일링 변화 등을 파악하고 있다.

AI 디자인 스튜디오도 활용한다. 참고 이미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하고 색상과 소재, 그래픽 등을 바꾼 여러 시안을 빠르게 만든다. 확정된 디자인을 생산에 필요한 작업지시서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에도 AI를 활용한다. 회사 측에 따르면 기존 최대 6주가량 걸리던 일부 디자인 기획·검토 업무가 하루 단위로 줄어든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샘플을 만들고 회의를 거쳐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던 기존 개발 방식에서 AI를 이용해 사전에 다양한 디자인을 검토하면서 시간을 줄인 것이다.
AI가 가장 빠르게 파고든 분야는 패션 콘텐츠 제작이다. 유럽 온라인 패션 플랫폼 잘란도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광고 이미지와 모델의 디지털 이미지를 제작하고 있다. 일부 마케팅 콘텐츠는 제작 기간이 기존 6~8주에서 3~4일로 줄었고 제작 비용도 약 90% 절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라도 실제 모델을 촬영한 뒤 AI를 활용해 같은 모델이 여러 상품을 착용한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을 도입했다. 상품이 바뀔 때마다 모델과 촬영팀이 다시 모여 촬영하던 과정을 일부 줄일 수 있는 셈이다. H&M 역시 실제 모델을 기반으로 한 AI 디지털 이미지를 패션 콘텐츠 제작에 활용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랜드도 상품이 생산된 이후 판매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 데 AI를 활용하고 있다. 상품 이미지를 바탕으로 AI가 모델 착장 이미지를 만들고 광고 콘텐츠와 온라인 상세페이지까지 제작하는 방식이다. 현재 스파오와 미쏘, 후아유, 로엠 등 주요 브랜드에 적용하고 있으며 향후 패션 브랜드 전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랜드월드 관계자는 “반복적인 업무는 AI가 수행하고 사람은 고객과 시장을 더 깊게 보는 데 시간을 쓰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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