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이번에 여기 알파시티는 김부겸이 많이 밀었거든. 힘 있는 사람을 찍어서 대구를 살리자고 했는데…"</i>
지난 15일 대구 수성알파시티에서 만난 공인중개사 A씨는 지역 경기와 상가 공실 현황을 묻는 말에 지난 지방선거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보수 정당의 오랜 텃밭인 대구에서 나온 뜻밖의 화두였습니다.
'대구의 판교'를 내걸고 조성한 첨단산업단지에서 선거 이야기가 먼저 나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정부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발표한 3200조원 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에서 대구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탓입니다. 여기에 단지의 핵심 사업인 8000억원 규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 사이에선 "지방선거에서 김부겸 전 총리를 찍었어야 했나"는 뒤늦은 회한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 '대구의 판교'라더니…"어딜 봐도 공실"
수성알파시티 한복판, AI 데이터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던 광활한 부지는 여전히 공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컨소시엄의 핵심 운영사로 참여했던 SK AX(옛 SK C&C)가 사업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알려지면서입니다.앞서 대구시는 2023년 12월 SK AX와 SK리츠운용, 아토리서치 등과 '대구 수성알파시티 ABB 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투자 및 협력 협약'을 맺었습니다. 약 8000억원을 들여 수전용량 30MW, 부지 면적 9917㎡, 연면적 2만9700㎡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짓는다는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토지 매매 계약을 비롯한 후속 절차가 계속 미뤄졌고, SK AX는 약 2년 반 만에 사업에서 발을 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대구시는 AI 데이터센터 사업 자체가 좌초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대구시 관계자는 "여러 회사가 문의를 해오고 있고 실무적으로 조율 전 단계"라며 "제일 좋은 방안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새로운 사업자가 대기업이 아닐 경우 투자 규모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투자 규모는 기존)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대구시의 역점 사업이 이같이 출발선에서 멈춰 선 사이 단지 내 상가 건물 곳곳에는 '임대'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A씨는 이 같은 알파시티의 현실을 '외로운 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가까운 편인데도 뭔가 고립돼 있고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 든다"며 "여기 입주한 회사들도 매출이 한계선에 걸쳐 있는 위태위태한 기업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상가 상황에 대해서는 "공실이 많다. 사실상 거의 다 비어 있다고 보면 된다"며 "남아 있는 곳들도 결국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상가 관계자 B씨는 "SK AI 데이터센터가 무산돼 실망이 매우 크다"며 "국가나 대구시에서도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업이고, 명색이 수성구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어 "대구 전체가 고령화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 1인당 GRDP 33년째 꼴찌…20대는 떠난다

현장에서 체감한 대구의 현실은 경제지표에서도 드러납니다. 지난해 말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4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3137만원으로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최하위입니다. 1위인 울산(8519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전국 평균(4948만원)과도 큰 격차를 보였습니다. 1993년 최하위에 내려앉은 뒤 33년째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장세도 더딥니다. 대구는 2024년 8대 특·광역시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0.8%)을 기록했습니다. 지난달 발표된 '2026년 1분기 실질 지역내총생산'에서도 올해 1분기 성장률은 2.4%로 반등했지만, 전국 평균(3.8%)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같은 기간 충북(13.8%), 경기(6.2%), 서울(4.8%)이 평균을 웃돈 것과 대조적입니다.

지난달 기준 고용률도 58.5%로 전국 시·도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이에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고 있습니다. 올해 1분기에만 대구에서 1725명이 순유출됐고, 이 가운데 20대가 1267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한국의 사회지표'는 대구 인구가 지난해 233만5000명에서 2052년 179만6000명으로 23%(53만9000명)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상권의 빈자리에서도 대구의 쇠퇴 징후가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대구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2024년 3분기 15.5%에서 2025년 1분기 16.5%, 2025년 4분기 18.1%, 2026년 1분기 18.3%로 꾸준히 높아졌습니다. 특히 서문시장·청라언덕 상권은 같은 기간 28.3%에서 36.2%로 뛰었고 동성로 중심 상권도 19.8%에서 26.3%로 상승했습니다. 인구 감소와 소비 위축의 여파가 전통시장과 도심 핵심 상권의 빈 점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정부와 기업의 대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은 지역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웠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2040년까지 평택·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650조원, 광주 신규 팹에 400조원, 천안·온양 HBM 팹에 56조원 등 총 2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SK하이닉스도 용인 600조원, 청주 100조원, 서남권 클러스터 400조원 등 총 1100조원을 단계적으로 투입할 계획을 내놨습니다.공교롭게도 같은 날 민선 9기 대구시장직 인수위원회가 투자유치단을 신설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유치를 임기 내 핵심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터라 더욱 뼈아팠습니다. 지난 3일 나온 영남권 투자 계획 역시 기대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총 312조원 규모였지만, 절반에 가까운 140조원이 울산 AI 데이터센터 몫이었습니다. 이에 지역에선 대구·경북에 배정된 투자 규모와 내용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 "단돈 1원도 못 가져왔다"
대규모 기업 투자에서 대구가 제외되자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반발했습니다. 발표 직후 추경호 대구시장은 "반도체 팹의 입지는 정치적 안배가 아니라 시장과 기업의 투자 전략, 경쟁력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며 "어떤 기준으로 후보지를 검토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 결론에 이르렀는지 국민 앞에 투명하게 설명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정치권의 대구 기업 투자 유치를 위한 움직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TK 의원들은 지난 22일 국회에서 '반도체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 전략' 토론회를 열고 대구·경북이 반도체 생산기지의 최적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추 시장은 서면 축사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져온 대구·경북을 외면한 채 정치적 이해관계나 논리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심각한 국가 재원의 낭비"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이인선 국민의힘 대구시당위원장도 "대구에는 경북대와 지능형 반도체 개발센터가 있다"며 "대구·경북이 손을 꼭 잡고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지역 정치권에선 기존 정치인들을 향한 책임론도 나옵니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4일 페이스북에서 "정부와 기업이 합작 투자하는 수천조원 규모 사업에 대구는 단돈 1원도 가져오지 못했다"며 "윤석열 정권 때도 있으나 마나 하던 대구 국회의원들이 무슨 대책이 있고 정책이 있느냐. 그 투자들이 현실화되면 대구는 영원히 GRDP 꼴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대구의 판교'를 꿈꾸던 알파시티의 데이터센터 부지는 아직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대구시는 새 사업자를 찾고 정치권은 기업 유치를 외치고 있지만, 33년째 이어진 1인당 GRDP 최하위 기록 앞에서 시민들이 기다리는 것은 더 이상 장밋빛 청사진이 아닙니다. 기업이 들어오고 청년이 머물며 빈 상가에 다시 불이 켜지는 변화입니다. 선거 때마다 반복돼온 '대구를 살리겠다'는 약속이 이번에는 빈말에 그치지 않을지, 알파시티의 텅 빈 부지가 그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정우/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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