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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 출신 에릭 오 "AI 시대, 이야기의 본질인 글쓰기로 돌아가야"

입력 2026-10-08 14:50   수정 2026-10-08 15:04

픽사 출신 에릭 오 "AI 시대, 이야기의 본질인 글쓰기로 돌아가야"



에릭 오를 하나의 수식어로 설명하긴 어렵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픽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독립해 영상 감독이 된 뒤 영화, 미디어 아트, 음악 등 활동 영역을 다양하게 넓혔다. 수백 명의 인간 군상이 피라미드형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표작 <오페라>로 미국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장르를 넘나들던 그가 이번엔 문학으로 향했다. 첫 소설집 <천사의 위스키>를 펴낸 그를 아르떼가 만났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에릭 오(42)가 소설집 <천사의 위스키>를 쓴 계기다. 본업은 애니메이션 감독이지만, 영상만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생각이 쌓이자 문학을 창작의 돌파구로 삼았다. 기존에는 글을 영상 제작을 위한 ‘설계도’로만 활용했지만,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확장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많은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는 영상 제작과 달리,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현할 수 있는 문학의 ‘속도감’도 소설을 집필한 큰 이유가 됐다.

표제작 ‘천사의 위스키’의 출발점은 자신의 경험이었다. 고된 하루 끝에 자동차를 몰며 그저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순간이다. 여기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락, 악몽 같은 버전”을 얹었다. “정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한 감독이 됐을 때를 극화해보고 싶었어요.” 소설집엔 표제작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그는 1년 2개월 동안 “폭발적으로 썼다”고 말했다. 출간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이야기를 쓰는 행위와 문학 수준의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여겼기 때문. 작가들에게 피드백을 구하고, 소설의 기법과 장치를 공부하며 다섯 편을 썼다. 그러던 중 원고가 지인의 손을 거쳐 출판사에 건너갔고, 민음사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출간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창작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였어요. 이 정도 어려움도 못 버틴다면 예술을 할 수 없겠죠.”

그가 문학에서 새롭게 발굴한 지점은 단연 인물의 ‘내면’이다. 이는 그간 그가 걸어온 행보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평생 ‘그림쟁이’로 살아온 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는 대사나 내래이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대사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음향과 사운드, 언어 이상의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애니메이션답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랬던 그가 시각적 연출을 넘어 인물의 복잡한 속내를 낱낱이 고백하는 소설의 세계로 파고든 것은 극적인 반전이다. “사람이 혼자 멍하니 불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고 해보죠. 영화라면 그저 바라보는 모습만 보여줄 수 있지만, 문학은 그 순간 그 사람이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내면을 낱낱이 기록할 수 있어요.” 그래서일까. <천사의 위스키>에는 에릭 오 자신이 직접적으로 투영돼 있다. “멋있는 걸 많이 했으니, 창피함을 드러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림과 영상으로 작품을 만들 때는 그 속에 숨을 수 있었는데, 글을 쓰는 순간엔 숨을 구석이 없더군요.”

작품 속 아홉 명의 주인공은 절망과 기쁨 사이 어딘가에 멈춰 서 있는 인물로, 오 감독 자신의 모습이자 그가 바라본 보편적 인간상이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모순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존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이번 소설에서 전하고자 한 주제는 ‘순환’과 ‘모순’이다. 에릭 오는 삶과 죽음, 선과 악처럼 상반된 가치가 연결돼 있다고 본다. “무의미와 공허에 부딪히더라도 왜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가 스스로 쌓아 올린 시각적 연출의 틀을 깨고 텍스트라는 파격적 선택을 하게 된 데는 상업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느낀 깊은 갈증도 작용했다. 자본이 대거 투입된 작품일수록 “캐릭터가 좀 더 귀여워야 하지 않겠나” “너무 어둡다” 등 다양한 목소리가 개입했다. “한번은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서진 적이 있어요. 이런 방식이라면 결과물을 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죠.”





AI의 등장 역시 그의 창작 매체 이동을 부추긴 배경이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기술적 격변을 현장에서 목격한 그는 “지난 몇십 년간 이어져온 영상 제작 프로세스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100명이 붙어야 했던 작업이 첨단 기술로 단숨에 대체되고, 이미지가 손쉽게 생성되는 현실이 한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회의감도 들었다. 에릭 오가 답을 찾은 건 ‘원천 창작’이었다. “한 땀 한 땀 이미지를 만드는 일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어디에 시간을 쓸 것인가 고민한 끝에 이야기의 본질인 글쓰기로 돌아갔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AI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보조 도구로 활용하되, 기술이 상향 평준화될수록 역설적으로 “창작자 고유의 뾰족한 비전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 바라봤다.

매체 간 경계를 넘나드는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과 함께 아홉 편의 이야기에 대응하는 연주곡 음반을 제작해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또한 11월 29일까지 서울 일상비일상의틈에서 대표작 <오페라>를 전시 형태로 선보인다. 한 층 전체를 활용해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 대해 그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 ‘움직이는 그림’처럼 봐주셨으면 한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에릭 오는 앞으로도 형식에 갇히지 않고 아이디어에 가장 적합한 매체를 자유롭게 선택해나갈 생각이다. 첫 소설집을 마친 소회를 묻자 그는 “예전엔 총 하나로 싸웠다면, 이제는 칼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설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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