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제인 중 한 명이다. 지난 8월 말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열린 ‘제1회 한·일 저출산 대응 심포지엄’에는 그를 취재하려는 일본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최 회장의 동선을 가로막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호텔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기자도 있었다.일본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SK하이닉스의 일본 반도체 공장 건설 가능성이지만, 최 회장이 줄곧 주장해온 ‘한·일 경제공동체론’에도 관심이 커지는 분위기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경제협력론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느슨한 연대를 넘어 유럽연합(EU)과 같은 하나의 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배경에는 급변한 세계 경제 질서가 있다. 미국은 동맹국에도 관세를 앞세워 자국 이익을 요구하고,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막대한 보조금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희토류, 에너지까지 경제와 안보의 경계도 무너졌다. 기업끼리 경쟁하는 시대를 넘어 경제권끼리 힘을 겨루는 시대가 됐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과 일본의 처지는 모호하다. 각각 놓고 보면 미국과 중국, EU에 비해 경제 규모가 작다. 하지만 둘을 합치면 약 6조달러, 세계 4위권 경제권이 된다. 액화천연가스(LNG)를 공동 구매하면 가격 협상력을 높이고, 반도체 공급망을 묶으면 경제 안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SK그룹의 사업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반도체와 AI, 에너지는 한·일 협력의 핵심 분야이자 SK의 주력 사업이다. 일본의 소재·장비 기업과 한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이 더 깊게 연결되고, 양국이 AI 데이터센터와 에너지 인프라를 공동 구축한다면 SK에도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대만 TSMC 사례처럼 일본 정부의 파격적인 투자 지원을 끌어낼 여지도 있다.
한·일 경제공동체도 반도체 공급망, LNG 공동구매, 공동 투자와 장기계약처럼 실익이 분명한 분야부터 하나씩 묶어가면 된다. 양국 기업이 함께 공장을 짓고 공동 연구를 늘리며 인재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은 한·일이 처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미·중이 짠 판에서 ‘룰 테이커’로 남지 않고 목소리를 키우려면 한·일 스스로 경제적 몸집을 불리고 협상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국익의 셈법으로 일본을 바라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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